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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숙

시인 권순진의 시마을

등록일 2020년01월17일 14시03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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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숙

가나의 어느 부족에선 사람이 죽으면
관 모양이 생전의 직업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어부였던 사람은 배나 물고기 모양...
구두장이는 구두 모양의 관에 담긴다

시인이란 이름으로 살고 있는 나는
시집이나 펜 모양의 관을 그려보지만
아니다 시로써 돈을 벌어보지도 못했고
흔한 문학상으로 명예를 얻어 보지도 못했으니
시인이라고 할 수도 없다
삼십 년을 주부로 살았으니
밥솥이나 냄비 모양을 생각해보지만
아니다 전업주부라 하기엔 시와 통정한 시간이 너무 길다
국적없는 집시처럼 바람에 이끌리며 산 것이다

어느 한 곳에 내 전부를 던져본 적 없어
작가로서도 주부로서도 이념도 없고 신념도 없다
이 시대의 작가라면 이름에 올랐을 블랙리스트에도
나는 운 좋게 빠져 있는 시인이다
오늘을 살며 진보도 못되고 보수도 못되는 나는
붉은 깃발이나 태극기 모양은 더욱 아니다
가나식이라면 나는 죽어서도 관 모양이 없을 것 같다

- 계간⟪문학청춘⟫2017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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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에선 사람이 죽으면 천국으로 간다고 생각해 축제처럼 장례가 치러진다. 밴드와 가수의 신나는 음악에 맞춰 웃는 얼굴로 춤을 춘다. 이들은 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관 모양은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물건으로 하거나 종사했던 직업과 관련된 모양으로 제작한다고 한다. 탱크, 물고기, 젖소 같은 모양의 관에 시신을 안치시킨다. 고추농사를 짓던 사람이 죽으면 고추 모양 관을, 생전에 콜라를 엄청 좋아했다면 코카콜라 관을, 비행기 한번 타보는 게 소원이었던 사람이면 가나에어 비행기 관에 넣어 시신의 한을 풀어주기도 한다.

우연히 가나 장례 풍습을 듣고 시인의 습성이 발동하여 ‘나는’ 어떤 관에 담겨질까를 생각한다. 자신은 ‘시인이란 이름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다. 먼저 내세울만한 신분인지라 ‘시집이나 펜 모양의 관’을 떠올려보는데, ‘시로써 돈을 벌어보지도 못했고’ ‘흔한 문학상으로 명예를 얻어 보지도’ 못했음으로 당당히 시인이라 하기엔 어쩐지 멋쩍다. 그렇다면 다음은 30년차 전업주부겠는데 이 역시 큰 보람과 긍지를 갖고 임했던 역할이 아닌지라 마땅찮다. 나머지는 이념의 성향을 살펴보지만 자신은 ‘붉은 깃발’도 아니고 ‘태극기 모양은 더욱 아니다’

살면서 누구나 이런 ‘관’ 핑계가 아니더라도 ‘나는 누구인가?’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자문을 할 때가 있다. 대개는 자기 스스로를 별로 뛰어난 재주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여길지 모른다. 그래서 대부분의 집안에서 지방을 쓸 때 ‘학생부군’ 즉, ‘배우는 학생으로 일생을 살다 가신’이라고 적는 것이리라. 대부분의 유생들은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기 때문에 죽어서도 공부를 계속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평생 벼슬 한번 못해본 백수건달이라도 ‘학생’으로 살고 죽어서도 ‘학생’으로 살라니 얼마나 멋진 축복인가.

어느 당파에 가담하지 않는 것 또한 다행한 일이다. ‘오늘을 살며 진보도 못되고 보수도 못되는 나는’ 그래서 안심이다. 어느 한쪽에 휘둘리지도 발목 잡힐 것도 없으니 얼마나 자유로운가. 진중권 씨처럼 정의당을 뛰쳐나가면서 탈당계 잉크도 마르기 전에 곧장 녹색당을 지지한다고 선언할 만큼 조급증으로 촐싹대지 않아도 일 없다. 말 나온 김에 그 분이 경비행기를 소유하고 있다는 말은 들었어도 평화와 자연과 환경에 천착해왔는지는 모르겠다. 정의당에서 받은 감사패를 쓰레기통에 바로 버렸다고 한 그를 녹색당에서 반길지도 의문이다.

그는 고 노회찬 의원이 계시다면 자기편에 서있을 것이라 했지만 과연 그럴까. 늘 정의와 원칙을 강조하면서 대중의 인기를 누려왔던 분이 노회찬의원의 빈소에는 왜 가지 않은 걸까. 그가 갖는 콤플렉스이자 아킬레스건 가운데 하나가 과거 민주화운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바가 없다는 전력이다. 오래 전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호남권에서 90%를 상회하자 “그렇게 90%넘는 지지를 받은 것이 자랑스러우면 차라리 전라인민공화국을 건설하라.”고 했던 사람이다. 늘 이런 식이지만 그를 가장 쉽고 단순하게 바라볼 수 있는 판단근거들이 아닐까.

누가 지적하고 누구처럼 독설을 날리지 않아도 뭐가 잘못이고 무엇이 우려되는지 잘 안다. 정부여당을 지지하더라도 너무 많은 청와대 참모들이 총선에 출정한다든지, 검찰인사가 검찰의 오만방자한 폭주에 거는 제동이란 측면에서는 잘 됐다고 판단하지만 의혹은 정상적인 수사를 통해 털고가야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누구처럼 ‘싸가지’없이 기본적 양심을 저버릴 생각은 없다. 많이 배우지 못해 딸리는 게 많고 내세울 것이 없어서 ‘가나식이라면 나는 죽어서도 관 모양이 없’을 테지만 ‘學生’이란 간판은 따 놓은 당상이니 이 아니 기쁘지 아니한가.

권순진

형남수 기자 hnsoo@daum.net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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