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 꽃만 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어디 나머지를 바를 만한 곳이 없나 찾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어 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너무 많이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문득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내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보는 그런 사이이다
부부란 서로를 묶는 것이 쇠사슬인지
거미줄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이다
- 시집 『다산의 처녀』 (민음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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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은 둘이서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제정된 ‘부부의 날’이다. 부부란 엄밀히 말하면 계약관계이다. 오래전 법전을 들추어본 기억으로는 부부관계를 ‘서로 동거하고 부양하며 협조하는 관계’로 알고 있다. 육체적, 경제적, 정신적 상호 원조의무를 뜻하며, 더 쉽게 요약하면 섹스(혹은 사랑)와 돈과 대화이다. 부부의 기종과 연식, 취향에 따라 어느 것이 더 비중이 있고 덜 할 수는 있겠으나 이 중 어느 하나만 탈이 나도 곧장 위험해질 수 있는 관계가 부부다. 대체로 나이가 들수록 상대적으로 중요해지는 것은 정서적 교감이고 대화라고들 한다.
물론 아무나와 무턱대고 이런 계약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왜 하필 나이고 당신인가. 우연인가 운명인가. 어느 시에서처럼 ‘아무리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도꼬마리씨’같은 것일까. 왜 하필 내게 붙어 왔을까. 우연 같지만 필연이고 운명인 것이 부부다. 하지만 요즘은 '졸혼'이란 일본문화가 급속히 확산되어 우리한테까지 문화현상으로 옮겨와 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는 좋은 아내를 얻은 남자라고 탈무드는 말하고 있다. 탈무드에 따로 언급하진 않았으나 가장 행복한 여자 역시 말할 나위 없이 좋은 남편을 얻은 여자일 것이다.
운명적으로 그런 좋은 남자, 좋은 여자를 만나기란 당연히 쉽지 않다. 처칠에 버금가는 존경을 받았던 영국의 유명한 재상 '디즈레일리'는 35세 때 15세나 연상인 과부와 결혼했다. 50세인 마리안느는 미모가 출중하지도, 지적 매력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결혼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을 다루는 기술과 존경심이었다. 언제나 미소로서 남편을 편하게 했고 힘을 북돋워주며 존경했다. 그리고 남편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나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패하지 않으리란 믿음을 가졌다.
디즈레일리는 그런 아내를 고맙게 여기며 아내를 사랑으로 감쌌다. 그는 결혼생활 30년 동안 아내로 인해 마음 상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한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사랑을 기반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과부 마리안느는 당시 상당한 재력가였고 디즈레일리는 자신의 정치인생에 도움이 될 그 돈에 이끌렸다. 훗날 디즈레일리는 "사실 난 돈 때문에 당신과 결혼했어"라고 실토했다. 그러나 이어서 "만약 당신과 다시 결혼한다면 그때는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들에게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시키는 긴 과정'이 아니라 사랑의 긴 발효과정이었다. '결혼이란 전생의 원수가 다시 만나 한평생 함께 살면서 서로 원수를 갚고 빚을 갚는 일'이라는 시인의 부부론에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허구한 날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도 ‘서로를 묶는 것이 쇠사슬인지 거미줄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다. 그러나 그 현실적 운명론을 인정하면서도, 그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해 뒤늦게 가슴 적시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권순진
* 사진은 70년 전 1949년 5월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식 모습이다. 당시 경기도지사(49년 서울특별시로 승격하기 바로 직전이라 서울시는 경기도 관할이었다) 비서로 계셨던 아버지의 빽(?) 덕택에 매우 이례적으로 덕수궁 석조전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1919년생 아버지는 31세 노총각이었고 어머니는 그보다 8세 아래였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사신 기간은 고작 40년이었다.